
종이책과 인쇄된 이야기와 느슨한 연대
종이 매체는 사양산업이라는데, 어쩐지 독립출판은 호황입니다. 독립출판, 중에서도 독립잡지들은 이전에 본 적 없던 다양성과 모두를 무대에 세우는 평등함을 앞세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현대인들의 힙-한 자기 표현 수단으로 떠올랐습니다.
대체 무슨 매력일까. 취향을 저격하는 컨텐츠의 힘도 힘이지만, 저는 ‘책의 물성’이라는 키워드를 끄집어내봅니다. 종이책의 질감. 소리. 인쇄본 특유의 색감과 냄새. 오감을 자극하는 책의 물성은 SNS의 ‘위장된 연결'(“언제나 연결되어있다.”)로부터 해소되지 못 하는 ‘접촉’에 대한 갈증을 충족시켜주는 듯 합니다. 덕분에 책이라는 매체가 누군가의 이야기를 좀 더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수단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종이책에 인쇄된 낯선 이의 고민이 어쩐지 나와 같다면. 비단 손에 감기는 것은 종이 뿐만이 아닐 테죠. ‘나다운 일’을 하는 사람들을 다룬 3권의 잡지로부터 느슨한 연대를 만끽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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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vorite> 4, 5호
양록과 분홍. 손에 포근히 감기는 색지 위로 세리프의 favorite이라는 글씨가 또렷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증과 함께 펼친 세상에는 ‘좋아함의 설렘과 의미있음의 뿌듯함’으로 가득합니다. <favorite>은 “삶의 주인이 되어 좋아하는 일을 의미 있게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매거진 입니다.
2017년 12월, 제주도의 게스트 하우스 호스트들을 다룬 1호부터 시작해, 자신만의 모습으로 일하는 이들을 찾은 ‘1人 work’ (2호), 나만의 취향으로 시그니처 아이템을 만드는 사람, 또는 골라 담은 사람들을 모은 ‘make & select’ (3호).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함께’ 일하며 ‘같이’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는 동업자들을 담은 ‘we work together'(4, 5호)가 발간되었습니다.
we work together이라는 주제 때문인지, 잡지도 짝 지어 나왔습니다. 두 권의 볼륨에는 두 배로 많은 인터뷰이, 두 배로 배부른 인사이트가 담겨 있습니다. 읽으면서 밑줄 친 문장을 공유해봅니다.
케이트는 동업을 하기로 결정할 이유를 줬을 만큼 남다른 타인이에요. 그런데 결국 타인이라는 존재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고 그 영역 때문에 불안감이 생기는 거 같아요. 그래서 상대에게 줄 수 있는 불안과 미지의 영역을 줄이고자 노력하는 것이 함께 일하는 관계에서 가장 책임감을 느끼고 신경 쓰는 부분이에요.
앨린과 케이트는 지금 시대의 계급과 같은 직업, 사회적 위치 같은 것들을 내려놓고 각자의 존재로서 마주 보고 나눌 수 있는 대화에 대한 고민을 <취향관>으로 풀어냈다.두 사람은 성격, 성향, 취향이 모두 다르지만 서로가 갖고 있지 않은 부분을 서로로부터 채운다.
동업이다 보니 내가 오늘 하루 한 일보다 ‘pinzle(핀즐)’이 하루 디딘 걸음이 더 크게 느껴질 때가 좋아요. 그건 제가 가진 능력이 커져도 커버를 못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쓴 텍스트에 너무 멋있는 디자인이 입혀지고 전략이 실려서 나오면 정말 뿌듯해요. 나는 번만 했는데 같이 하기 때문에 10번까지 가 있어요.
다섯 명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pinzle(핀즐)>은 매 월 큐레이션한 작품과 함께 매거진을 보내준다. 그들은 매거진을 쓰기 위해 ‘굳이’ 해외로 아티스트를 만나러 가기도 한다. 차별성을 강조하는 모든 곳에는 각자만의 ‘굳이’가 있다면서.
<favorite>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https://www.instagram.com/favorite_mag/
<딴짓> 12호
원래 ‘딴짓’은 나쁜 거였습니다. 공부 안 하고 딴짓한다던가, 일 안 하고 딴짓한다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는 이유는, 그런 ‘딴짓’이야말로 나에게만 의미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밥벌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위한 무언가를 해나가는 사람들, ‘밥벌이하며 딴짓하는 모두를 위한 잡지’ <딴짓>을 소개합니다.
‘딴짓’이라는 말이 이렇게나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건 다 그들 덕분입니다. 딴짓시스터즈는 2015년 <딴짓> 1호를 발간한 이래, 그들의 ‘딴짓’을 5년째 이어가고 있습니다. 시즌 1에서는 ‘남자’들의 딴짓(2호), ‘일개미’ 특집(3호), 살아온 터전을 떠나 다르게 사는 사람들(4호), ‘황혼’의 딴짓(5호), ‘혼자’하는 딴짓(8호), 퇴사개미 휴직개미 재입사개미들(9·10호), ‘함께’하는 딴짓(11호)까지 아주 다양한 딴짓들을 다뤘습니다. 시즌 2는 ‘일’에 관한 좀 더 다양한 질문을 하며, 12호의 “여자, 어떻게 일해야 할까요?”로 포문을 열었습니다.
<딴짓>은 딴짓시스터즈의 ‘딴짓’인 만큼 매 호마다 당시 그들이 마주한 고민을 드러냅니다. 저자들이 잡지의 모토대로 살아가는, 정말이지 ‘이름값’하는 잡지입니다. 읽으면서 밑줄 친 문장을 공유합니다.
“단절되지 맙시다.” 퇴사 권하는 콘텐츠들 여자에게 해로워요(웃음). 20대에 잠깐 쉬는 건 괜찮지만 30대 중반 넘어가서 그만두면 그대로 단절되기 쉽습니다. 일을 놓지 않는 건 디폴트고요. 사회가 여성에게 주입하고 기대하는 전형적인 루트나 관성대로 살기보다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하길 바랍니다.
“어떻게 일해야 할까?”의 인터뷰이 <울프소셜클럽> 김진아 대표는 여성들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발이 있지 않겠는냐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그는 옳은 이야기보다 용기가 필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에서는 사회생활을 하려면 자기 몸을 부정해야 해요. 종일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하고, 사회가 원하는 몸을 만들어야 해요. 일을 하든 육아를 하든 사람은 몸으로 무언가를 하지 않나요. 그러니 내 몸에 대해서 잘 알고, 내 몸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해요. 그래야 타인을 대할 때도 어떤 도구로나 수단, 대상으로 대하지 않게 되죠.
“조금 다르게 일할 순 없을까?”의 인터뷰이 <변화의 월담>의 리조 대표는 몸으로 아는 것, 피부로 느끼는 삶은 다르다고 말했다. 변화의 월담은 젠더나 나이, 사회적 지위, 국정 등과 관계 없이 사람이라면 해볼 수 있는 움직임을 실험하고 탐구하며 자기 자신과 관계에 대해 배우는 곳이다.
<딴짓>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https://www.instagram.com/ddanzit_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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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r> 14호
‘행복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소개하는 매거진 <bear>는 아스트랄한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행복한 일’이라니까 잘 먹고 잘 사는 동화나라 꿈의 세상이 펼쳐질 것만 같은데, 오히려 ‘견디고’ ‘참아냄’ 없이는 ‘곰돌이’ 만한 따끈한 행복도 오지 않는다는 리얼한 이야기들 뿐이지요. “행복이란 끊임없이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라던 어느 철학자의 말이, 잡지를 덮을쯤 떠올라 무릎을 탁 쳤습니다. <bear>가 정의하는 ‘행복한 일’이란 그런건가 봅니다. 사랑하는, 자주 괴로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밖에 없는.
<bear>는 “멋진 주말보다는 멋진 평일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포부에 맞게 작지만 진짜 내 일을 하는 사람들을 다룹니다. 각 호마다 주제를 정해, 그 분야에서 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커피(1호), 꽃(2호), 제빵(3호), 집(4호), 옷(5호), 식물(6호), 흙(7호), 과자(8호), 책(9호), 기억(10호), 빛(11호), 시골(12호), 고양이(13호)까지. 키워드만으로는 유추불가능한 다양한 이들이 지면 속에서 ‘나다움’을 논합니다.
14호의 주제는 ‘그림책.’ 아이들이 볼 거라는 선입견 때문에 어른들이 미처 보지 못 하고 지나친 순순한 애정과 철학이 그림책을 만드는 손길에 담겨 있었습니다. 읽으면서 밑줄 친 문장들을 공유해봅니다.
책이 재미있는 게, 회화 작업이 한 장 한 장 그려서 미술관에 그림을 거는 거라면 책은 대량 생산되고 카피되고 싼값에 공급되는 거잖아요. 저는 인쇄된다는 게 좋았어요. 회화의 아우라가 깨지더라도 퀄리티가 떨어지는 인쇄 과정에서 오는 그 느낌이 좋았어요. 뒤틀어지는 느낌. 예술을 좀 바꿔보고 싶었어요.
이수지 작가는 그림을 좋아하고 책을 좋아해 그림+책을 만든다. 여전히 ‘그림책으로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죽기 전까지 다 그릴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는 그는 아이들의 즉발적인 움직임을 캐치해, 그 생동감을 그려내길 좋아한다.
왜 ‘어른의 일’이라고 하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다만 제가 좋아하는 일 위주로 천천히 많이 하려고 해요. 자기 삶을 자기가 산다는 면에서는 아이의 세계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요. 남들이 사는 삶을 나도 비슷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안 하려고 해요. 우리가 조금씩 자라서 어른이 된 것처럼 아이와 어른의 세계가 벽으로 나뉘어 있지 않아요.
김지안 작가는 어린 시절에 좋아한 것들과 지금 좋아하는 것들의 조각을 조합해 그림책을 펴낸다. 그는 아이와 어른의 세계는 일종의 그라데이션 같다고 말했다. 이쪽 저쪽을 구분 짓기보다는 내가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쪽을 하는 거라 말하면서.
<bear>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https://www.instagram.com/bear_magazine/

공통된 질문으로-접촉-하기
결론에 와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봅니다. 우리는 왜 이 잡지에 눈이 갈까. 실물에 손이 가는 이유를 ‘접촉’이라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렵게 고민할 필요도 없이, 그의 질문이 나의 질문과 같기 때문일 겁니다. 지금 나의 시점에서 갖고 있는 고민을, 누군가는 이미 겪었으리라는 짐작 때문이지요. 그가 내놓은 대답이 궁금한 것이죠. 어떤 실마리를 얻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므로 끊임없이 ‘연대’입니다. 앞서 고민한 사람에게서 실마리를 찾기도 하고, 같은 질문에 헤매고 있다면 함께 방법을 간구하면서요. 그래서 저는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나다운 일’을 하고 계신가요?
그 일을 해나가는 지금, 무엇이 가장 고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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